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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것이 아닌 시간
Review, Time In Ignorance ∆T≤720
2020, Kim Nam-see 김남시
 EWHA Woman University, Seoul, KR



인간의 것이 아닌 시간





음악이 아닌 시간

<Time in Ignorance>의 작가 그레이코드와 지인은 둘 다 작곡을 전공하였다. 그런데도 전시장에서 맞닥뜨린 걸 ‘음악’이라고 부르지는 못하겠다. 사루비아 지하 전시장을 울리고 있는 사운드가 조성 Tonality의 구속에서 벗어난지 오래인 현대음악의 문법에 더 가깝기 때문만도, 소리 말고도 컨덕터, 모니터, 드로잉이 함께 전시되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여기서 ‘전시’되고 있는 시간 탓이다.


음악은 오래전부터 시간 예술이라고 불려왔다. 그런데 시간 예술이라고 말할 때의 ‘시간’은 어디까지나 지각하는 인간 주체와 관련된 시간성이었다. 그건 하나의 음이 그 다음에 이어질 음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불러내고(Protention 예지豫持), 의식에 남은 그 음의 여운(Retention 파지把持)이 다음에 등장하는 음과 마주칠 때 생겨나는 만족이나 긴장감을 음악의 핵심으로 보는 인간주의에 기반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분절된 음들의 연쇄에 주목하며 감응하는 지각주체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Time in Ignorance> 에서는 그런 식으로 지각될 수 있는 것들이 없다. 전시의 중심에는 소리 혹은 진동이라 불릴만한 것이 지속적으로 울리고 있지만 거기에는 듣는 이에게 예지와 파지를 불러낼만한 분절된 음들이 없다. 5월 13일 18시 오프닝 콘서트에서 시작된 61Hz의 진동 주파수는 매 시간 0.0347222 헤르츠만큼씩 낮아져 전시 종료일인 6월 12일에는 36Hz로 끝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다. 36Hz는 전시장에 설치된 스피커 시스템이 낼 수 있는 가장 낮은 음역의 소리다. 그 이하가 되면 그나마 민감한 관객에게 간헐적으로 감지되던 소리는 아예 가청영역에서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지속되는 사운드 정보를 실시간으로 컴퓨터 드로잉으로 변환해 보여주는 영상들 - <Drawings for the Mathematical Model of Dynamic System>, <Chaoplexity> - 에서도 좀처럼 어떤 변화를 알아차리기 힘들다. 미확인 비행 물체를 닮은 컨덕터 – <Transducer I> - 가 이 사운드 정보를 진동으로 전환시키고 있다지만, 거의 들리지 않는 사운드에 동반되는 이 거의 보이지 않는 떨림을 두고 미디어 설치작업에 자주 등장하곤 하는 사운드의 시각화라고 말하기는 쑥스럽다. 720시간 동안의 진동 주파수와 Modulation (변조)의 변화를 완만한 역 S자의 도표로 보여주는 <Quantized Notation>도 악보라기보다는, 우리가 인지 못하는 흔들림을 기록하는 지진계의 응답 스펙트럼 Response Spectrum에 더 가까워보인다. 이 모든 게 720 시간 동안 일어난다. 전시제목이 말하듯 그야말로 ‘인지되지 않는 시간’, ‘무지 속에 있는 시간’이다.  





관람 시간과 작품 시간  

<Time in Ignorance>에서 작품은 720 시간 동안 지속된다. 이건 전시가 30일 동안 진행된다는 말이 아니다. 매일 전시장의 문을 열고 닫는 미술 전시기간을 아무 이유없이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720 시간은 작품이 지속되는 시간이다. 5월 13일에 시작된 소리-진동과 영상 이미지들의 변화는 전시장 관리자가 퇴근하고, 전시장이 문을 닫아도 계속된다. 720시간은 말 그대로 작품이 연속되는 시간이다. 이렇게 작동하는 작품은 전시장을 방문한 관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창작자조차 완결된 단위로 지각하거나 포착할 수 없다. 작품의 시간이 관람(가능한) 시간을 과도하게 초과해버리기 때문이다.   

             

작품의 시간과 관람 시간 사이의 긴장은 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퍼포먼스 아트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정 내러티브를 재현 re-present 해온 전통적인 연행예술과는 달리 현전 present 하는 사건성을 추구하는 퍼포먼스는 시간의 가상적 축약1)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Durational Performance"는 관객 앞에 현전하는 작가의 신체가 실시간으로 감내하는 시간을 테마로 삼았다. Durational Performance의 출발은 1971년 크리스 버든 Chris Burden의 ”Five-Day Locker Piece“로 알려져 있는데, 버든은 캘리포니아 대학 구내 5번 사물함 속에 들어가 문을 잠근 채 닷새를 지냈다. 1972년 <Bed-Piece>에서 버든은 22일 동안 갤러리 공간에서 지냈는데, 그 동안 갤러리를 방문한 관객들은 거기서 말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작가를 직접 볼 수 있었다. 2002년 <The House with ocean view>에서 아브라모비치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관객에게 개방된 무대 위에서 12일의 시간을 보냈다. 작품의 시간과 작가가 살아가는 시간의 경계를 해체시켜버리는 이런 퍼포먼스에서 작품의 진행 시간은 관람객이 지각하거나 포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작품의 시간이 그를 관람하려는 관객의 삶의 시간을 요구해 온다. 삶의 시간 밖에 놓아두던 예술이 관객의 삶의 시간을 뚫고 들어온다.



작품의 진행시간이 관객의 포착 가능성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Time in Ignorance>도 이런 퍼포먼스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작품의 시간이 인간에게 체험되느냐 아니냐이다. Durational Performance가 진행되는 시간은 관객이 관람을 멈추고 다른 일을 보거나 집에 돌아가더라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는 퍼포머 자신에 의해 체험된다. 관객은 온전히 체험할 수 없었던 그 시간을 온전히 ‘견디어낸’ 작가의 체험이 이런 퍼포먼스의 핵심이다. 삶의 시간을 예술 관람을 위해 갈아 넣을 수 없는 관객은 작가가 한 그 체험의 진정성에 감동하고, 그 둘 사이의 간극에서 작품의 메시지가 발생한다.2) 반면 <Time in Ignorance>의 720 시간은 어떤 인간 에이전시에 의해서도 체험되지 않는다. 여기서 720 시간의 진동을 만들어내는 건 인간 연주자가 아닌 프로그래밍된 기계장치다. 720시간 동안 진동을 발생시키는 컴퓨터와 기계장치에 감정이입하거나 감탄하는 관객은 없다. 전시기간 내 전시장을 방문한 관객은 인간의 개입 없이 울리는, 인간의 지각 여부와는 무관하게 작동하는 진동을 부분적으로만, 그것도 가까스로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이때 감지라는 것도 어떤 소리를 ‘들었다’라고도 말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오히려 그 순간 관객의 신체는 전시장 공기층에 퍼져나가던 소리 파장이 부닥쳐 방향을 바꾸는 물리적 장애물에 가깝다. 여기서 관객은 무엇인가를 체험하는 주체이기 보다는, 그가 무언가를 들을 수 있건 아니건 상관없이 전시장 공간을 울리는 진동 주파수에 연루되는 객체가 된다.






엔트로피적 시간성  

<Time in Ignorance>의 작품 시간은 관객은 물론 작가조차 온전히 관람하고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인간 주체의 체험과는 독립적인 시간으로 우리를 주체의 권좌에서 끌어내려 사물과 같은 객체로 자리잡게 하는 시간이다. 작가는 이를 “비가시권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이 작가 듀오는 그런 “비가시권의 시간을 실제경험으로 감각”하게 하려는 목표를 좇는다. 체험될 수 없기에 주관화되지 않는 시간, 그럼에도 우리 신체가 들어선 공간 전체를 규정하는 시간을 ‘실제 경험으로 감각’하게 하는 예술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 질문을 위해 정확히 이런 관점에서 예술에 접근했던 한 인물을 떠올려보자. 작가이자 비평가인 로버트 스미슨 Robert Smithson(1938~1973)이다. 그는 예술을 우주 전체에서 일어나는 엔트로피 증가라는 맥락에서 보았다. 엔트로피란 물질계의 상태를 나타내는 열역학적 양의 하나로, 모든 폐쇄된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에너지 상실과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의 핵심 개념이다. 질서란 끊임없이 증가하는 엔트로피에 맞서는 에너지인데, 그 에너지는 엔트로피가 증가함에 따라 상실되고 만물은 그런 질서가 무너진 물질의 평형상태에 도달하려고 한다. 스미슨은 땅/대지 Earth를 작업의 근본 재료로 삼았다. 끊임없이 침식하고 붕괴하면서 가장 안정적 단위인 입자와 파편들로 침전되는 대지야말로 비평형에서 평형상태로의 이행의 구체적 현실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땅은 중력에 저항하는 에너지가 소멸되어 최종적으로 정착하고 퇴적되는 곳이며, 어떤 식으로든 조직되어 있던 모든 생명체와 사물들이 결국 평형상태의 입자들로 환원되어 모이는 곳이다. 생명체는 물론 형태와 질서를 지닌 모든 사물은, 스미슨이 ‘원초적 과정 primary process’이라 칭한 저 평형상태로의 이행이 그저 잠시 ‘억제 arrested’ 되어있는 상태에 다름 아니다.3)



중요한 건 여기서 부각되는 시간성이다. 엔트로피의 증가, 평형 상태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본다는 건 인간의 시간, 인간의 역사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는 거대한 물질의 시간을 사유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간성에서 보자면 한 명의 작가가 머리 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오브제화한 작품을 두고 무시간적 영원성 운운하는 건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된다. 작가가 사용하는 재료,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도구, 작가 자신의 신체, 심지어 작가의 두뇌에서 일어나는 물리, 화학적 과정을 포함한 예술과 관련된 모든 것은 이미, 물질계 전체를 규정하는 원초적 과정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미슨의 대지 작업은 물질이 파괴되고, 흘러내리고, 용해되고, 산화/부식되어 침식하는, 물질계에서 일어나는 저 원초적 과정의 샘플링이다.



흥미롭게도 <Time in Ignorance>의 작가들 역시 비평형에서 평형상태로의 이행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비평형에서 평형으로 향하는 과정 안에 있다. 오프닝 연주를 통해 복잡성을 특성으로 하는 혼돈의 모습, 즉 비평형의 순간이 생성된다. 비평형의 상태는 자연에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절대적 조건으로, 이후 30일의 전시기간 동안 사운드 작품은 그 비평형의 상태를 벗어나는 움직임을 발생시킨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자발적 변화들은 환원될 수 없는 비가역적인 상태이며, 우리는 그 변화 안에서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4)



6천 톤의 돌과 흙을 호수에 부어 만든 <나선형 방파제>(1970)가 물에 잠겨 흘러내리고 침식되면서 평형상태로 이행하는 물질의 원초적 과정을 샘플링했다면, <Time in Ignorance>는 수백억년에 걸쳐 일어나고/일어날 비평형에서 평형으로 향하는 과정을 720시간으로 압축하여, 소리-진동과 컴퓨터 영상을 통해 시뮬레이션 한다. 여기서 예술은 인간의 감정이나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체험할 수도 표상할 수도 없는 시간, 탈 인간화된 우주적 시간성을 통해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게 하는 프리즘이다. 스미슨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러한 “시간성의 의식을 통해 보면 한 사물은 無인 무엇인가 something that is nothing 로 변한다. 모든 것을 삼키는 engulfing 이러한 감각이 사물/오브제에 대한 정신적 지반을 제공하면, 그건 단순한 사물/오브제임을 멈추고 예술이 된다. 사물/오브제는 점점 덜한 것이 되어 더 명확한 무엇인가가 된다. 모든 사물은, 그것이 예술이라면, 움직이지 않더라도 시간의 돌진 rush으로 충전되어 있다." 5)



<Time in Ignorance>는 인간의 체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시간, 비인간 객체들과 인간 객체 모두에게 충전되어 있는 시간, 인간이 체험할 수 없어도 돌진하고 있는 시간을 환기한다. 우리는 46억년 지구의 역사에서 미세한 점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역사가 지구표면의 국지적 오염을 넘어 지구의 깊숙한 내부, 지질학적 층에까지 그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었다. 인류세 Anthropocene 는 인간의 역사가 지구 자체의 역사와 연루되어 있음을 지시하는 단어다.6) 우리가 탄소를 배출하며 이동하고, 생산하고, 버리고, 폐기하는 시간, 지금껏 인간만의 것이라고, 그래서 무한히 주어져 있다고 여겼던 시간이 지구의 시간, 지구의 수명과 맞물리게 되었다. 그 지구적 시간은 내가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비행기를 타고 휴가 여행을 갈 때도,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모든 수업과 회의, 전시를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지금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Time in Ignorance>의 720 시간은 이 지구적 시간의 샘플링이다. 우리는 아직, 이 우주가 어떻게 평형상태에 도달하게 될지 알지 못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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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퍼포먼스의 먼 기원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연극에서도 우리는 연극을 관람하는 동안 무대 위에 있는 배우들의 시간을 공유한다. 배우가 연기를 하는 시간동안 그의 삶의 시간은 그 연기를 바라보는 나의 삶의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전통적인 연극에서는 극 중의 시간과 무대 위의 시간이 늘 일치하지 않는다. 연극은 현재의 어떤 장면을 보여주고 나서는 곧 10년 후의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그 1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뛴다.” 우리는 1막에서 부왕의 유령과 만나 복수를 약속받은 햄릿과 정신이 이상해진 듯한 모습을 보이는 2막의 햄릿 사이에는 2개월의 시간이 있고, 관객에게 그 시간은 막이 바뀌는 순간 이미 지나가버린 것으로 상정된다. 그 동안 일어난 일을 상상하는 관객에게 극중에서 흘러간 것으로 간주된 2개월의 시간은, 실지로는 약 5분 정도로 축약되는 것이다.


  2) 예정된 퍼포먼스가 끝나고 구조물에서 내려온 아브라모비치는 관객들을 향해 “나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단식을 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여기 지금에 존재하기 위해 단식을 한 것입니다....나는 이것을 뉴욕과 뉴욕의 사람들에게 헌정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없는 이 도시에서 나는 시간의 섬을 만들어내길 원했습니다.” James Westcott, Marina Abramovic's The House with the Ocean View, The View of the House from Some Drops in the Ocean, TDR, Vol. 47, No.3, Autumn 2003, 136.


  3)  Robert Smithson, "A Sedimentation of the Mind: Earth Projects", ART FORUM.  


  4)  작가노트


  5)  Robert Smithson, "A Sedimentation of the Mind: Earth Projects", ART FORUM, 90-91.


  6)  Timothy Morton,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 2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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